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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앞으로 쭉 가더라도 멀리 갈 수는 없어요.
요기* 있는 사람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말하지 않아도

 

나는 연기

나는 방으로 향한다

 

이미 열린 문을 열기 전에도

노크는 해야 해서

새 숨을 세 번 뱉는다

 

뭐 하고 있었어

뭐 하지 않고 있었어

 

네가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고 시 쓰지 않는 동안

 

나는 나무가 되었다가 산이 되었다가 고양이가 된다

변신하는 동안에는 이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오직

 

문을 통해 나서는 일만 가능하다 내가 나일 때보다 내가 나 아닐 때 출입은 한결 수월해진다 나는 날마다 외출하는 사람이므로 아침마다 변신해야 한다 새벽 요가원을 등록한 건 그래서였다 돌아오는 길 나는 흔들리지 않는 나무와 불타지 않는 산 아침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고양이를 보았다고 너에게 말해주었다 너는 거꾸로 존재해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에 안도한 너는 벽이 나타날 때마다 물구나무를 섰다 아무리 지나쳐도 벽이 계속 나타나는 바람에 너는 곤란해졌다

 

반복을 반복해서는 안 돼

반복은 영원을 믿게 하니까

 

너에게 곤란한 영원이

내게는 곤란하지 않다는 걸

 

꼭꼭 숨겼다

꼭꼭 숨었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거라고

보이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거라고

믿는 아이처럼

 

매트 위에 얼굴을 묻고 누웠다

 

보기 위해서는

보면 안된다는 말에 눈을 감았다

 

테두리 밖으로 나의 뒤꿈치

빠져나왔다

 

우리가 여기 있는 데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요기: 요가 수행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토끼를 세탁기에 넣는 방법

1. 세탁기 문을 연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것이 없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일에 대해서는 더는 설명하지 않겠다고 어느 일기를 적으며 다짐했다.)

2. 토끼를 세탁기에 넣는다
나는 세탁기에 토끼를 넣을 때 울지 않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새 토끼를 입기 위해 지난 토끼를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해하였으므로 지갑에서 세탁방 멤버십 카드를 꺼냈다. 바구니에 담아온 하얀 토끼들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두었다. 깨금발을 한 채 몇 마리인지 세어보다 잘못 달려온 검은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걸 덥석 집어 들었다. 안돼. 너는 슬플 때 검은 눈물을 흘리잖아. 하얀 토끼가 더 하얘지는 걸 방해해서는 안 돼.

3. 세탁기 문을 닫는다
의자에 앉아 검은 토끼의 거슬거슬한 털을 쓰다듬으며 문을 열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에 대해 상상했다. 토끼가 사라진다. 토끼는 원래 토끼는 존재이므로 설령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다, 슬픈 일이 될 수는 있어도.

슬픔에는 얼마간 익숙한 면이 있다.
슬플때는 수학을 하면 도움이 된다.

세탁방 자판기에 종이가 들어있는 건 그 때문이다. 유난히 새하얀 종이 한 장을 뽑아 토끼가 여전히 토끼일 확률과 토끼가 토끼 아닌 존재가 될 확률을 계산했다. 아무리 계산해도 발생 가능한 모든 사건의 합이 1이 되지 못해 무엇을 놓쳤는지 곰곰 생각했다. 종이를 더 뽑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전을 넣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그건 토끼가 토끼이면서 동시에 토끼가 아닐 확률이었다. 토끼는 그럴 수 있는 존재였다. 가끔 익숙한 사실을 새하얗게 잊어버리곤 한다.

Drawing Studio

   미술 시간을 좋아한다고 미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을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을 구분하지 못한다 미색 켄트지를 바라보기만 하는 내게 선생님은 점이라도 찍어봐 선이라도 그어봐 말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는 나에게는 쉬는 시간 그 애를 기다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 
   
   펜 있어? 없는데 연필은 있어 볼펜의 죽음은 여러 번 목격했지만 연필은 기껏해야 줄음뿐이라 빌려줄 수 있다 꼭 돌려줄게 고개를 끄덕이지만 돌아올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래야 빌려줄 수 있다 꼭 돌려줄 거야 반복해서 말하는 그 목소리를 듣는 건 좋아서 그 애가 연필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척하지 않는다 돌아온 연필 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약간 뭉툭해져 있을 뿐이다 뭉툭해진 심은 부러지지 않는다 그 점이 좋아서 연필을 깎은 후 부러 부러뜨리곤 했다 뭉툭해진 연필로 손안의 점을 누른다 이 점을 들키고 싶지 않아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쥔다 그 애는 오른쪽 눈 밑에 점이 있다

 

   어릴 적 생긴 상처인데 시간 지나니까 점이 되었어 나도 처음부터 점이었던 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거 알아?상처난 자리에는 점이 잘 생긴대 그렇지만 가끔 모든 걸 털어놓고 싶기도 하지 내 몸 안의 점, 선, 면에 대해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만들어졌는지 말해버리고 싶기도 그러다 엉망이 된 채 잔뜩 후회하고 싶기도 하지

   사실 그건 점이 아니라 심(心)이야
   그날 나는 어떤 마음을 그렸어

   박힌 건 빼내야 하지만 그린 건 지우지 않아도 되어서 손에 묻은 건 닦지 않는다 괜찮다고 말하면 잠시 괜찮아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손바닥을 그 애 얼굴 가까이 가져간다 두 점이 겹쳐지는 순간 생긴 것과 만들어진 것은 구분할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