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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 있을게

  서울예대 학보 366호 학생칼럼

 

  2025년도 동계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다. 7명의 7기 임원진들과 함께하는 회의는 매주 목요일 저녁 9시에 진행된다. 그날은 세트 리스트 관련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캐럴 메들리 어때? 좋지. 그런데 공연할 즈음이면 이미 크리스마스 끝나 있을 텐데··· 거리에는 아직 종소리가 울려 퍼지지도, 반짝이는 트리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크리스마스 이후의 날들을 자주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 아직 다 가지 않은 2024년도의 끝을 감각하기도 전에 성큼 다가온 2025년도를 준비하는 회의실의 시간은, 바깥보다 삼 개월 정도 빠르게 흘러간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대에 먼저 가 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약 두 시간의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 어느덧 밖은 깜깜해져 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지. 차가운 겨울 공기가 훅 얼굴을 덮친다. 어둠 속 빨간색, 버건디, 초록색, 흰색, 은색의 불꽃만이 빛나는 돕바들과 걷는다. 흰색과 은색 1이 앞장서서 걷는다. 버건디 1이 회의하며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자, 옆에 있던 은색 2와 내가 따라 부른다. 가사를 정확히 몰라 발음을 흘려도 우리는 흥겨움에 젖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다음 주에 보자. 일주일의 시간이 착실하게 흐르고 다시 또 목요일. 우리는 각자의 노트북을 앞에 펼친 채 동그랗게 모여 앉는다. 워크숍의 전반적인 콘셉트와 타이틀, 어떤 곡을 하고 싶고, 할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눈다. 그리고 어떤 무대로 기억됐으면 좋겠는지도.

 

  지난여름, 나는 어떤 시절이 멜로디의 형태로 기억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오르골의 손잡이를 돌리듯 기억의 태엽을 감으면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글로켄슈필, 마라카스, 멜로디언, 바이올린, 소프라노와 테너 리코더, 스네어, 유포니움, 첼로, 캐스터네츠, 클라리넷, 트라이앵글, 플루트, 피아노, 호른. 각각의 악기를 적어 내려가는 동안 각각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동시에 각각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들과 함께 있던 시간과 공간을 채운 악기 소리, 그보다 컸던 웃음소리를 선명히 기억한다. 언어와 잔뜩 밀착해 있던 한 학기를 보내고 마주한 여름 방학, 나는 우리가 우리이기 위해 언어가 그리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정확한 음을 짚어내기 위해 정갈한 마음으로 연습해서인지,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정박자로. 여름을 여름의 빠르기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여름에 도착하기 전 미리 여름에 가 있던 6기 임원진들 덕분이다. 연습 전 건반을 세팅하고, 뽑아온 악보를 나눠주고, 할 수 있다고 외치고, 틈틈이 연습 영상을 찍어두는 것뿐만 아니라 다 적지 못하는 복잡하고 세세한 일들을 미리미리 하느라 땀 흘렸던 사람들.

 

  그들을 뒤따라 걷던 여름을 지나, 이제 한 걸음 앞서서 겨울을 걷는다. 고개를 돌리면 옆에 7기 임원 친구들이 있다. 우리는 한 해의 가운데에서 가장자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고심해서 선곡한 플레이리스트를 함께 흥얼거리다 보면, 한 곡이 끝나고 곧장 다음 곡이 자동 재생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흘러가 버린 몇 곡의 음악 뒤에서 혼자 생각한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지.’ 가까워지는 메리 크리스마스와 해피 뉴이어, 그보다 살짝 앞선 기말시험과 종강···. 나는 이 모든 것을 기다리며 여전히 흥얼거리고 있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에 끝나지도 않을 멜로디를. 얼마 남지 않은 2024년도, 우리가 그리고 있는 악보인 2025년도 동계 워크숍도 무사히 완성될 거라는 사실을 더는 의심하지 않는다.

 

  24.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