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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쭉 가더라도 멀리 갈 수는 없어요.
Drawing Studio

   미술 시간을 좋아한다고 미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을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을 구분하지 못한다 미색 켄트지를 바라보기만 하는 내게 선생님은 점이라도 찍어봐 선이라도 그어봐 말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는 나에게는 쉬는 시간 그 애를 기다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 
   
   펜 있어? 없는데 연필은 있어 볼펜의 죽음은 여러 번 목격했지만 연필은 기껏해야 줄음뿐이라 빌려줄 수 있다 꼭 돌려줄게 고개를 끄덕이지만 돌아올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래야 빌려줄 수 있다 꼭 돌려줄 거야 반복해서 말하는 그 목소리를 듣는 건 좋아서 그 애가 연필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척하지 않는다 돌아온 연필 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약간 뭉툭해져 있을 뿐이다 뭉툭해진 심은 부러지지 않는다 그 점이 좋아서 연필을 깎은 후 부러 부러뜨리곤 했다 뭉툭해진 연필로 손안의 점을 누른다 이 점을 들키고 싶지 않아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쥔다 그 애는 오른쪽 눈 밑에 점이 있다

 

   어릴 적 생긴 상처인데 시간 지나니까 점이 되었어 나도 처음부터 점이었던 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거 알아?상처난 자리에는 점이 잘 생긴대 그렇지만 가끔 모든 걸 털어놓고 싶기도 하지 내 몸 안의 점, 선, 면에 대해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만들어졌는지 말해버리고 싶기도 그러다 엉망이 된 채 잔뜩 후회하고 싶기도 하지

   사실 그건 점이 아니라 심(心)이야
   그날 나는 어떤 마음을 그렸어

   박힌 건 빼내야 하지만 그린 건 지우지 않아도 되어서 손에 묻은 건 닦지 않는다 괜찮다고 말하면 잠시 괜찮아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손바닥을 그 애 얼굴 가까이 가져간다 두 점이 겹쳐지는 순간 생긴 것과 만들어진 것은 구분할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