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불을 켜서 어둠을 내쫓을 수 있으니 당장은 불을 켜지 않는다.
이 어둠을 그대로 둔다. 나는 어둠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이미 밝은 곳이 더 밝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뿐이다.
한곳에 모아둔 컵과 접시를 들고 설거지를 한다. 물소리라 듣기 좋다. 고무장갑을 걸쳐두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 똑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모두들 나에게 리듬을 맞춰줬으면 해. 금방 싫증을 내는 성격에 잘하는 악기 하나 없는 것이 항상 아쉽다. 그렇지만 나의 어린 외로움이 어디선가 일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확신 없이 즐겁다.
설거지를 하다 고무장갑 속에서 반지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돈다. 주먹을 꽉 쥐면 검지와 반지 사이에 난 작은 틈이 생기고 부러 그 틈으로 아까보다 조금 더 어두워진 집을 지켜본다. 편의점에서 맥주 살 때 신분증 검사를 하면 기분이 좋으면서 젊은 시인이라는 말에는 어쩐지 어색해진다. 나에게는 이미 사라진 내가 있다. 아무리 해도 그보다 내가 젊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내가 젊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양 아래서 나는 네 편이야. 너는 무심하게 내 마음을 밟고 지나가. 행성들을 모아 모래성을 지어줄게. 난 널 안타까워하지 않아. 우린 결코 같은 편이 아니지. 그렇지만 난 그저 네 편이야.
나는 최대한 참을 수 있을 만큼 참다가 불을 켠다. 나는 이곳을 단번에 밝게 만든다.
일기에 한 문장을 적어도 하루보다 길다. 내가 젊은 것이 아니라 써야 할 일기가 너무 긴 탓이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살 수는 있지만, 맥주를 마시려면 편의점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